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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이 아니라 영토다

AI 시대의 마케팅은 광고를 사는 게 아니다. 버티컬 전체를 점령하는 것이다. 빅테크가 들어오기 전에 당신의 영토를 먼저 채워라.

한때 나는 마케팅을 "도달"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클릭률. 전환율. ROAS. 우리는 숫자를 최적화하는 게 마케팅이라 배웠다. 더 많은 사람에게,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이 팔리도록. 이 방정식이 마케팅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 생각이 근본적으로 틀렸다는 걸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광고비를 올릴수록 불안해지는 이유

성장하는 서비스는 보통 이런 패턴을 따른다. 초기에는 바이럴이나 입소문으로 사용자가 유입된다. 그러다 어느 시점부터 광고를 돌리기 시작하고, 광고가 효과를 보이면 예산을 늘린다. 예산을 늘릴수록 사용자도 늘어난다. 그렇게 광고에 의존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문제는 그 다음에 온다.

광고비를 잠깐 줄이면 유입이 뚝 끊긴다. 경쟁사가 같은 키워드에 입찰을 시작하면 CPC가 오른다. Meta나 Google이 알고리즘을 바꾸면 ROAS가 흔들린다. 플랫폼이 정책을 바꾸면 광고 소재가 거부된다. 우리는 플랫폼 위에 집을 지었는데, 그 땅이 우리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광고 의존형 마케팅의 구조적 취약점이다. 우리는 사용자에게 도달하는 비용을 계속 지불하고 있지만, 그 채널을 소유하지 못한다.


버핏이 말한 해자, 그리고 마케터가 놓친 것

워렌 버핏은 투자할 기업을 고를 때 "경제적 해자(Economic Moat)"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고 말했다. 해자는 성 주변을 둘러싼 물길 — 경쟁자가 쉽게 넘어오지 못하게 막는 방어선이다.

기업의 해자는 여러 형태가 있다. 원가 우위, 브랜드 충성도, 네트워크 효과, 전환 비용. 버핏이 Coca-Cola에 투자한 이유는 맛이 좋아서가 아니라, 100년에 걸쳐 구축된 유통망과 브랜드가 모든 신규 진입자를 막는 해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케터들은 버핏의 투자론을 읽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친다.

마케팅 자체도 해자가 될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 AI 시대의 마케팅은 해자를 만드는 행위 그 자체여야 한다. 광고는 도달이다. 해자는 점령이다. 이 둘은 근본적으로 다른 행위다.


AI가 마케팅의 구조를 어떻게 바꾸는가

광고 기반 마케팅이 지배적이었던 시대에는 이유가 있었다. 콘텐츠를 만들고 도구를 개발하려면 사람이 필요했고, 사람은 비쌌다. 작은 팀이 수십 개의 버티컬 미니 툴을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광고를 사서 사람을 데려오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AI가 이 방정식을 완전히 바꿨다.

콘텐츠 생산 비용이 거의 0에 수렴하고 있다. 간단한 웹 도구 하나를 만드는 데 이제 며칠도 걸리지 않는다. Claude나 GPT를 활용하면 계산기, 체크리스트, 생성기 같은 미니 서비스를 주 단위로 출시할 수 있다. 예전에는 엔지니어링 팀이 6개월 걸릴 작업을 이제 마케터가 2주 안에 할 수 있다.

생산 비용이 무너지면 전략도 바뀌어야 한다. 과거의 제약이 사라졌는데도 과거의 전략을 쓰는 건 비효율이 아니라 실패다.


버티컬을 점령한다는 것의 의미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전자연구노트 서비스를 운영한다고 가정하자. 고객은 대학 연구실, 기업 연구소, 정부 과제를 수행하는 연구자들이다. 예전 마케팅이라면 이렇게 했다. "전자연구노트 추천", "연구 데이터 관리 솔루션" 같은 키워드로 광고를 돌리고, 블로그 아티클을 써서 SEO를 올리고, 학회에 부스를 낸다.

이것도 나쁜 전략은 아니다. 하지만 이건 내가 사용자를 데려오는 전략이지, 사용자가 나에게 오는 구조를 만드는 전략이 아니다.

AI 시대의 마케팅은 다르게 접근한다.

연구자가 연구 과정에서 겪는 모든 마찰점을 내가 먼저 해결한다.

  • 연구비 계산기: 과제 예산을 입력하면 간접비, 인건비, 장비비 비율을 자동 계산. 연구 행정 담당자가 매달 엑셀로 하는 작업을 2분으로 줄인다.
  • IRB 서식 생성기: 기관별 심의 서식이 다른데, 연구 정보를 입력하면 해당 기관 형식으로 자동 생성.
  • 연구 노트 체크리스트: 논문 투고 전, 특허 출원 전, 과제 중간 보고 전 — 상황별 필수 확인 항목을 단계별로 안내.
  • 논문 참고문헌 포맷터: APA, MLA, Vancouver, 한국 학술지 스타일 등 한 번에 변환.
  • 연구 일정 템플릿: 과제 기간과 마일스톤을 입력하면 팀 전체 일정표가 자동 생성.

이것들은 광고가 아니다. 서비스다. 하지만 이 서비스들이 내 마케팅이다.

연구자가 연구비 계산기를 쓰러 왔다가 전자연구노트를 발견한다. IRB 서식을 만들다가 노트와 연동이 된다는 걸 알게 된다. 체크리스트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전자연구노트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나는 광고로 사람을 데려온 게 아니다. 사용자가 자연스럽게 내 생태계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전환 비용: 해자의 기술적 원리

마케팅 관점에서 이 전략이 강력한 이유는 단순히 유입 때문이 아니다. 전환 비용(Switching Cost) 때문이다.

연구비 계산기만 쓰던 사용자가 전자연구노트까지 연동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연구 데이터가 내 시스템 안에 쌓인다. 연구 기록, 계산 이력, 팀원 협업 내역. 이 데이터를 다른 서비스로 옮기려면 상당한 비용과 노력이 필요하다. 기술적으로는 마이그레이션이 가능하지만, 실제로 하는 사람은 드물다.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전환 비용이 가장 높은 서비스가 뭔지 알고 있는가? Salesforce다. 전 세계 영업팀이 Salesforce를 불만족스러워하면서도 계속 쓰는 이유는 딱 하나다. 거기에 쌓인 10년치 고객 데이터와 영업 이력을 옮기기가 너무 힘들어서다.

생태계 전략은 이 전환 비용을 의도적으로 설계하는 것이다. 사용자가 내 생태계 안에서 더 많은 것을 할수록, 떠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그것이 해자다.

광고는 사용자를 데려오지만 붙잡지 못한다. 생태계는 사용자를 자연스럽게 붙잡는다.


빅테크가 들어오기 전까지의 시간

여기서 한 가지 냉혹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Google은 이미 Google Scholar, Google Forms, Google Sites를 가지고 있다. Microsoft는 Office 365와 SharePoint로 기업 연구 환경을 파고들고 있다. Notion은 연구 팀에 빠르게 침투하고 있다. 이들이 연구 버티컬에 본격적으로 집중하기로 결정하면, 작은 서비스들은 순식간에 압박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여기에 없다.

빅테크가 특정 버티컬에 진입하는 시기는 예측 가능하다. 그 시장의 규모가 충분히 커지거나, 전략적으로 중요해지거나, 기존 제품과의 시너지가 명확해질 때다. 그 이전까지는 빈 공간이다.

이 빈 공간을 채우는 속도가 AI 시대 마케팅의 핵심 경쟁력이다.

연구 버티컬에 계산기, 체크리스트, 서식 생성기, 일정 템플릿이 이미 존재하고, 연구자들이 그 도구들에 익숙해져 있고, 데이터가 쌓여 있다면 — Google이 비슷한 서비스를 출시해도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이미 해자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AI 스타트업의 가치가 "아직 빅테크가 들어오지 않은 시간"에 달려 있다는 말의 진짜 의미다.


지저분하게 만들어라

이 전략을 처음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

"그렇게 많은 툴을 만들면 포커스가 없어지지 않나요?"

틀렸다. 오히려 반대다.

각각의 미니 툴은 독립적으로 동작하지만, 모두 같은 버티컬 안에서 같은 사용자를 섬긴다. 그 사용자가 툴 A에서 툴 B로 이동할 때 자연스럽게 핵심 제품을 발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포커스가 없는 게 아니라, 포커스를 버티컬 전체로 확장한 것이다.

이것을 나는 "지저분함의 전략"이라고 부른다.

깔끔한 단일 제품으로 승부하는 시대는 지났다. 버티컬 안의 모든 마찰점에 해결책을 배치하고, 그 해결책들이 서로 연결되어 사용자를 중심 제품으로 끌어당기는 구조. 겉으로 보면 지저분해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촘촘한 생태계다.

Apple이 iPhone만 파는 것 같지만, AirPods, Apple Watch, Apple TV, iCloud, App Store, Apple Pay가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그 생태계 안에 한번 들어온 사람은 쉽게 나가지 않는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

이 전략이 큰 기업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강조하고 싶다. AI 덕분에 1인 팀도, 5인 스타트업도 가능하다.

1단계: 버티컬 마찰점 지도 그리기

당신의 제품을 쓰는 사람이 하루 동안 하는 일을 따라가보라. 그 중에서 불편하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엑셀로 하고 있는 작업이 무엇인가. 그것이 미니 툴의 후보다.

2단계: 가장 작고 빠르게 만들 수 있는 것부터

완벽한 툴이 아니어도 된다. 80%만 해결해도 사람들은 쓴다. Claude를 활용해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실제 사용자 반응을 보면서 개선하면 된다.

3단계: 연결고리 설계

각 툴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 안 된다. 툴을 쓰고 나서 자연스럽게 핵심 제품으로 연결되는 경로를 설계해야 한다. CTA일 수도 있고, 데이터 연동일 수도 있고, 회원가입 게이트일 수도 있다.

4단계: 반복

생태계는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매달 하나씩 추가하면, 1년 후에는 12개의 마찰점을 해결하는 생태계가 생긴다. 빅테크가 그 영역에 들어오기로 결정했을 때, 이미 당신의 해자는 만들어져 있다.


마케팅의 정의를 다시 쓸 때

나는 이제 마케팅을 이렇게 정의한다.

마케팅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내 세계로 걸어 들어오게 만드는 모든 행위다.

광고는 그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도 점점 비싸지고, 점점 덜 효과적이 되는 방법.

AI 시대에 마케터의 역할은 광고 최적화가 아니다. 버티컬을 읽고, 마찰점을 발견하고, 생태계를 설계하는 것이다. 빅테크가 그 버티컬에 들어오기로 결정하기 전에, 그 공간을 먼저 채우는 것이다.

영토를 먼저 점령하는 자가 해자를 갖는다.

해자를 가진 자가 오래 살아남는다.

광고를 더 잘 돌리는 사람이 아니라, 영토를 먼저 채우는 사람이 AI 시대의 마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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